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폰토스 왕국 (문단 편집) === 최전성기와 몰락 === 미트리다테스 5세가 암살당하자 제8대 왕으로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 디오니소스(혹은 미트리다테스 6세 메가스 ; BCE 120~BCE 63)가 즉위했다. 로마의 [[루쿨루스]], [[폼페이우스]]와 호각을 이루며 전쟁을 이끌었던 저 유명한 미트리다테스가 바로 이 인물이다. 미트리다테스 5세의 왕비였던 라오디케 6세 게스파에피리스, 그러니까 그의 어머니는 미트리다테스 5세가 암살당하자마자 최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 디오니소스는 아버지가 부당하게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찬탈한 것에 대해 몹시도 분개했다. 그는 처음에는 소수파로 시작했고 어머니의 권위 아래 굴복해야 했으나, 대권을 손에 넣자마자 어머니를 폐하고 투옥시켰다. 그리고 옥좌를 견고히 하기 위해 그의 [[근친|누이 라오디케와 결혼했으며]], 형제들을 남김없이 모두 살해했다. 그가 누이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곧 로마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정복 정책을 펼쳐 콜키스(오늘날의 [[조지아]])와 그 북쪽으로 이어진 흑해 연안의 해안지대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곧 [[스키타이]]의 왕이자 북방 스텝 지역의 지배자였던 팔라쿠스와 부딪혀야 했다. 여기서 미트리다테스 6세는 스키타이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창하여 [[크림 반도]]와 [[보스포루스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팔라쿠스는 격퇴되었고 이후 스키타이는 지리멸렬해졌다. 이리하여 자신의 실력을 입증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 왕국]]의 [[니코메데스 3세]]와 손을 잡고 파플라고니아와 갈라티아에 침공하여 그곳을 분할했다. 비티니아 왕국은 그 직후 반(反) 폰토스 동맹을 결성했는데, 이에 분개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 왕국을 침공했다. 비티니아 왕국과 카파도키아 왕국은 갈라티아에 대한 모든 지배권을 상실했는데 그 사이 니코메데스 3세는 사망하고 [[니코메데스 4세]]가 왕위를 이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신속히 비티니아군을 괴멸시키고 프로폰티스 해협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그는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유도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수도를 그리스 도시국가였던 시노페로 옮기고 모든 왕족에게 그리스어를 쓰며, 그리스식 풍속을 익히게 하는 한편, 자신들의 혈통을 [[아케메네스 왕조|아케메네스 왕가]]에서 찾도록 명령했다. 곧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를 적으로 선포하고 자신을 "[[키루스 대제]]의 적법한 후계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메가스의 화신"으로 선전했다. 그의 군대는 에게 해를 건너 [[아테네]] 시민들의 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입성했으며, 그의 해군은 로마 해군을 [[로도스]] 섬에 가둬두는 데 성공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북부 아나톨리아와 서부 아나톨리아를 독점하는 강력한 왕국을 구축하게 되었다. 폰토스 왕국의 이런 비약적인 확장을 보자 [[아르메니아 왕국]]의 대왕 [[티그라네스 2세]] 메가스(재위 BCE 95~BCE 55)는 그와 혼인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그와 함께 운명 공동체를 결성했다. 그 직후인 BCE 90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영내의 로마인을 모두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E 90~BCE 85)의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폰토스의 장군 아르켈라오스가 지휘하는 폰토스-그리스 연합군은 로마군에게 처참하게 무너졌고, 결국 로마의 장군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BCE 83년, [[로마]]는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다시 한번 전쟁('''[[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선포했다. 집정관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전쟁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듬해에 로마군이 싱겁게 격퇴당하고 휴전 협정을 맺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세르토리우스]]가 마리우스파의 잔당을 이끌며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미트리다테스 6세 역시 행동을 개시했다. BCE 75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이로써 개막했다. 처음에 로마군은 별 힘을 쓰지 못했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 반란이 일단락되자 로마군은 본격적으로 소아시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티그라네스 2세까지 가담한 폰토스-아르메니아 연합군은 [[루쿨루스]]의 뛰어난 전술에 휘말려 대패했다. BCE 69년, 티그라네스 2세가 새로 건설한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가 로마군에 함락당하자 전쟁은 로마군의 완벽한 승리로 기울었다. 티그라네스 2세는 동맹을 폰토스에서 로마로 바꾸었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곧 아들 파르나케스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는데, 결국 그는 흑해 북안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자결했다. 뒤를 이은 사람이 제9대 왕이자 마지막 국왕인 '''[[파르나케스 2세]]'''(BCE 63~BCE 47)였다. 파르나케스 2세는 재빨리 루쿨루스를 대체한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는 데 성공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폼페이우스의 청을 받아 로마에 반대하는 도시인 파나고리아를 공격했고, 두 사람의 우호관계는 돈독해졌다. BCE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일어나자 그는 당연히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고,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살해당하자 그의 입지가 상당히 위태로워졌다. 결국 파르나케스 2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결국 [[젤라 전투]]에서 대패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의 희생 제물이 되어야만 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그 전투에서 패배하고 돌아갔는데, 로마의 편을 들어 반란을 일으킨 장수 [[아산드로스]]에게 살해당했다. 폰토스는 파르나케스 2세 사후 10년간 로마 공화국이 임명한 아시아 총독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그러다 기원전 39년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으로서 지중해 동부 세계를 다스리게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폰토스를 반으로 쪼개서 서부는 로마의 통치를 게속 받게 하고, 파르나케스 2세의 장남 '''[[다리우스(폰토스)|다리우스]]'''를 왕으로 세워서 동부를 다스리게 했다. 다리우스는 기원전 37년경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동생 '''[[아르사케스]]'''가 로마의 동의없이 왕을 칭했다가 반란자로 낙인찍혀 안토니우스의 토벌 명령을 받은 [[폴레몬 1세]]에 의해 제압당했다. 기원전 37/36년 폰토스 왕이 된 '''[[폴레몬 1세]]'''는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가담하여 안토니우스의 부관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와 함께 수송 부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가 지휘하는 파르티아 기병대가 수송부대를 기습 공격해 오피우스는 전사하고 수송부대는 몰살당했다. 그는 파르티아군에 생포되었지만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안토니우스가 원정 실패의 원인을 아르타바스데스 2세에게 돌려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을 때 협력했고, 메디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가 파르티아와 동맹을 끊고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는 데 기여했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소아르메니아 영토를 넘겨줬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내전을 벌일 때, 그는 파르티아의 침략으로부터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한 후 차례로 자살하자,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폰토스 왕위를 인정받았다. 기원전 26년 "로마인의 친구"로 공인된 그는 이에 보답하고자 폰토스 왕국내 모든 극장의 앞자리를 차지할 특권을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게 하사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보스포로스 왕국의 찬탈자 스크리보니우스를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리자 즉시 함대를 통솔하여 흑해를 가로질러 항해했다. 보스포로스인은 강대한 [[로마 제국]]과 싸우길 원하지 않았기에 스크리보니우스를 살해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보스포로스 왕국의 지배권을 폴레몬에게 넘겨줬다. 이에 주민들이 스키타이계 왕들이 왕위를 이어받던 관례가 무너지고 외부인이 왕으로 등극한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그리파는 기원전 14년 로마 함대를 이끌고 보스포로스로 진군해 반란군을 제압했다. 그는 주민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과거 흑해 연안 일대를 평정하여 명성을 날렸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손녀이자 [[파르나케스 2세]]의 딸이며, 스크리보니우스의 아내였던 [[뒤나미스(보스포로스)|뒤나미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뒤나미스는 왕권을 포기하길 거부하고 기원전 13년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족들이 있는 크림 반도 내륙으로 도주했다. 이에 폴레몬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외손녀인 [[피토도리다]]와 결혼했다. 기원전 8년, 폴레몬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크림 반도 내륙 부족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돈 강 어귀에 있는 타나이스 시를 파괴한 뒤 아스푸르기아노이(Aspurgianoi) 족을 공격했지만 크게 패하여 생포된 뒤 피살당했다. 보스포로스 왕국은 뒤나미스를 거쳐 [[아스푸르고스]]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폴레몬 1세의 왕비 '''[[피토도리다]]'''가 폰토스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녀는 콜키스와 킬리키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지만, 보스포로스 왕국은 끝내 되찾지 못했다. 이후 카파도키아 왕 아르켈라오스와 재혼하여 카파도키아 왕비도 겸했고, 아이들과 함께 카파도키아 궁정에 정착했다. 아르켈라오스와의 사이에선 자식이 없었고, 서기 17년 아르켈라오스가 죽자 자녀들과 같이 폰토스로 다시 돌아왔다. 38년 피토도리다가 사망한 뒤 차남 '''[[폴레몬 2세]]'''가 폰토스 왕위에 올랐고, 콜키스와 킬리키아도 동시에 다스렸다. 키지코스의 비문에 따르면, 그는 [[칼리굴라]] 황제의 누이 율리아 드루실라를 기리기 위해 개최된 경기를 주관했다고 한다. 47년에는 [[콤마게네 왕국]]의 안티오코스 4세와 함께 킬리키아에서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를 기리는 경기를 개최했다. 그러던 62년, [[네로]] 황제는 폰토스와 콜키스를 로마의 속주로 삼기로 했다. 폴레몬 2세는 이후로 킬리키아만 다스리다 74년 사망했고, 이후 킬리키아 역시 로마에 병합되었다. 이리하여 폰토스 왕국은 로마 제국령이 되었지만, 다른 [[속주]]들과 달리 일종의 [[자치구]]로서 잔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